ASMR도 루틴도 다 망했다 - 결국 우리 집을 살린 건 ‘밤 산책’이었습니다

수면

bonus-and1 2025. 4. 20. 14:51

아이의 수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습니다. 그래서 루틴을 만들고, 백색소음을 틀고, 자연 소리를 재생하고, 조명도 낮췄습니다.
“이제 완벽해. 아이는 금방 잠들겠지.” 그렇게 생각했던 저희는, 그 완벽함을 유지하려 애썼습니다.

하지만 현실은 늘 계획 바깥에서 시작되었습니다.
저녁 약속, 피곤한 몸, 엉켜버린 감정, 고장 난 스피커, 누군가의 울음,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아이의 눈…
이유는 매일 달랐고, 결과는 같았습니다.

ASMR이 들리지 않는 밤, 루틴이 무너진 밤, 그 모든 밤들 끝에서 우리는 ‘다 포기하고 나간’ 적이 있었습니다.
그게 바로 ‘밤 산책’이었습니다.

그날은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했었습니다.
아침부터 밥을 잘 안 먹었고, 낮잠도 거부했고, 온종일 칭얼거리며 기운을 뺐습니다.
밤 9시 반이 되었을 때, 나는 이미 탈진 상태였고, 남편도 말수가 줄어들었습니다.

아이도 힘들었을 겁니다.
잠자리에 누우려 하자 다시 칭얼거리기 시작했고, 평소엔 잘 듣던 자장가도 귀찮다며 고개를 저었습니다.
그 순간,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.

“우리 그냥 잠깐 밖에 나갈까?”

나는 그렇게 말했고,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아이에게 외투를 입혔습니다.
아이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. 조용히 신발을 신었습니다.

밖은 생각보다 선선했습니다.
가로등 불빛 아래 작은 그림자가 셋이 길게 늘어졌습니다.
아이는 말없이 걷다가 갑자기 “밤에 바람이 이렇게 조용한 줄 몰랐어”라고 말했습니다.

우리는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했습니다.
그저 주차장 옆 인도를 따라 한 바퀴, 단지 안 놀이터를 지나 한 바퀴.
누군가 달리기를 하는 것도, 멀리서 고양이가 지나가는 것도 아이는 조용히 지켜봤습니다.

딱히 특별한 대화도 없었습니다.
하지만 그 고요한 시간 속에서 아이의 숨소리가 천천히 가라앉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.
부모인 우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.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짧은 시간이 너무나 필요했던 거죠.

그날 밤,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10시 15분이었습니다.
보통보다 늦은 시간이었지만, 아이는 “물 마시고 이 닦을래”라고 스스로 말했습니다.
책을 읽자고도 하지 않았고, ASMR도 틀지 않았습니다.
그냥 옆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.

그날, 아이의 수면 루틴은 완벽히 무너졌지만, 수면의 질은 오히려 더 좋아졌습니다.
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까지 숙면했고, 다음 날 표정도 밝았습니다.

그제서야 우리는 깨달았습니다.
우리가 매일 밤 열심히 만든 ‘수면 루틴’은 어쩌면 아이에게는 스케줄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는 걸요.
루틴이 안정감을 줄 수는 있지만, 그날의 감정까지 포용해주지는 못했던 것입니다.

그날 이후로, 저희는 매일은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2~3번은 밤 산책을 갑니다.
특히 아이가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은 날, 낮에 흥분이 많았던 날, 정서가 살짝 흔들린 날이면
우리는 조용히 외투를 꺼내듭니다.

산책을 하며 특별한 대화를 하지는 않습니다.
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 아이는 하루를 자연스럽게 마무리하고, **‘몸을 통해 정리’**하는 느낌을 받는 듯합니다.

🔁 ASMR은 귀로 듣는 수면 신호였다면, 산책은 몸으로 느끼는 신호입니다.
부모가 옆에 있다는 안정감, 바람의 온도, 거리의 조용한 소리, 느린 걸음이 주는 리듬.

그 모든 것이 수면을 향해 천천히 아이를 이끄는 길이 되어주었습니다.

ASMR이 안 들리고, 루틴이 무너지고, 책도 안 읽히고, 아이가 울기만 하던 밤들.
그 모든 밤이 실패 같았지만, 결국 그 밤들이 우리를 '산책'이라는 새로운 대안으로 이끌어주었습니다.

수면 루틴은 꼭 똑같은 방식으로 매일 반복되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.
어떤 날은 책 한 권, 어떤 날은 ASMR, 어떤 날은 포옹, 그리고 어떤 날은 그저 걷는 시간이 더 큰 효과를 냅니다.

🌌 중요한 건 아이가 하루를 ‘안전하게 마무리한다’는 경험입니다.
잠이 드는 과정이 ‘억지’가 아닌 ‘회복’이 되도록 돕는 것,
그게 우리 가족에게 진짜 필요한 루틴이었습니다.